
독재자 히틀러의 정치 출발지는 독일 바이에른주(州) 뮌헨이다.
뮌헨이 속한 바이에른주(州)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 중 하나로 오래전부터 자치권을 누려온 특별한 곳이다.
독일의 16개 주 중 가장 넓은 주인 만큼 인구도 많으며 소득이 높은 부자 도시로 손꼽힌다.
남동부에 위치한 바이에른주는 독자적인 전통과 문화가 발달한 지역으로서 독일에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다.
이러한 바이에른주의 최대 중심지가 바로 뮌헨이다.
이 뮌헨에서 작은 정당으로 시작한 히틀러의 나치는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함을 활용해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수도 베를린을 좌파에게 점령당한 것에 대한 적대감과 바이에른이 가진 특수성을 바탕으로 뮌헨에서 ‘독일투쟁동맹’을 결성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을 향한 폭동을 계획한다.
리더는 히틀러였다.
1922년 10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로마 진군을 성공시켜 총리가 된 사건은 히틀러를 더욱 자극했다.
검은 셔츠단에 견줄만한 돌격대(SA)를 이미 창설해둔 히틀러는 이 사건을 롤모델 삼아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함께 폭동에 가담할 것을 모의했다.
▣ 에리히 루덴도르프: 독일 제국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중,후반부 독일 제국군의 육군 보병대장으로 실질적인 총지휘관이자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였다.
폭동 거사일은 11월 8일...
그날은 바이마르공화국 혁명 5주년
기념 집회가 예정된 날이었다.
▣ 혁명 5주년: 1918년 11월에 일어난 혁명으로 독일은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시작된다. 1919년 2월 6일부터 8월 11일까지 열린 국민의회가 헌법을 바이마르에서 채택했기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이라 부른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3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수립되면서 소멸되었다.
1923년 11월 8일 맥주홀에 3,000명이 운집해 있는 가운데 SA 돌격대 600여 명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맥주홀을 포위했다.
히틀러는 하늘을 향해 권총을 쏘며 “국민 혁명이 시작되었고 베를린과 바이마르 정부는 지위를 잃었으며 새 정부가 탄생 되었음”을 선언했다.
히틀러는 나치 지도부를 동원해 주지사 카르 등 바이에른주 지도부를 옆방으로 끌고 가 쿠데타 계획을 설명하고 반란 지원을 요구했다.
루덴도르프 장군의 중재로 주지사의 협력 약속을 받아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협력하겠다던 주 정부 인사들은 도망쳐 버렸고 다음 날 9일 새벽 3시에 주지사는 반란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치는 2,000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뮌헨 시내 시청 앞 광장으로 전진했지만 시민들의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한다.
정부 측은 경찰력을 투입해 진압을 시도했고 쿠데타 주모자들과 시위대는 뿔뿔이 도망치고 결국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해산되고 말았다.
히틀러는 폭동 이틀만인 1923년 11월 11일 체포되었다.
무솔리니처럼 총의 힘을 빌려 권력을 쟁탈해보려던 야욕은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실패가 히틀러를 일약 정치 스타로 만들어 주게 될 줄은 그땐 알지 못했다.
12편으로 이어집니다.
2025년 3월 16일
전.남양주시장 국민의 힘 남양주 병.위원장 조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