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자유전’과 초고령 농촌의 충돌…“투기농지와 생계형 임대 구분해야”
29일 오후 경기북부의 한 농촌 마을. 한낮 기온이 34도를 웃돌자 논밭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늘 한 점 없는 밭에서는 70대 농민이 무릎까지 자란 잡초를 뽑고 있었다. 허리는 90도 가까이 굽었고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노인은 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뒤 다시 밭고랑에 몸을 숙였다. 한 손으로 땅을 짚고 다른 손으로 잡초를 움켜쥐었다.
매물로 나온 가평읍의 밭, 그러나 전화 문의조차 없다.농지자격취득증명원 등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이다.땅 주인 A 씨는 "오일장에 내다 팔 수도, 농사를 지을 기력도 없다"고 하소연했다.[사진/정연수 기자]
“풀은 기다려주지 않아요.”
폭염에도 밭을 떠나지 못하는 고령 농민의 모습은 이곳에서 낯설지 않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났고, 마을에 남은 노인들은 성치 않은 허리와 무릎으로 논밭을 지킨다. 농사를 그만두고 싶어도 직접 경작하지 않으면 농지를 처분해야 하거나 불법 임대차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손을 놓지 못한다.
정부가 전국 농지를 대상으로 소유·이용 실태를 조사하면서 고령농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가평군에서 만난 70대 농민 A씨도 수십 년 동안 논밭을 일궜다. 이제는 몇 시간만 밭에 있어도 몸을 가누기 어렵지만 농사를 이어받을 자녀는 없다. 이웃에게 맡기고 싶어도 산간 농지는 규모가 작고 경사가 심한 데다 농기계 진입로와 농업용수가 부족해 무료로 내놓아도 경작자를 찾기 어렵다. 농지를 방치하면 휴경으로 문제가 될 수 있고, 이웃에게 맡기면 불법 임대차로 적발될까 걱정이다. 농지은행을 통한 임대 방법도 있지만 절차와 요건을 제대로 안내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농사를 안 지으면 문제가 된다는데 이제는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우리 같은 늙은 농민은 땅을 팔라는 것인지, 누구에게 맡기라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밭엔 농작물 대신 잡초만 무성하다.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가평읍 사진/정연수 기자]
연천군에서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비교적 넓고 농기계 작업이 가능한 논밭이 많지만 농업인구가 줄면서 일부 대규모 경작자가 여러 소유자의 농지를 빌려 농사짓는 형태가 늘고 있다.
고령으로 농사를 그만둔 B씨는 자신의 논을 이웃에게 맡기고 수확한 쌀 일부를 받는다. 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가까운 이웃이나 친척이 농사를 대신 짓고 농산물 일부를 나누거나 대가 없이 경작하는 것은 농촌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관행이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소유자가 직접 농사를 짓는 것으로 등록하고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 경작한 사실이 확인되면 ‘위장 자경’으로 판단될 가능성이 있다.B씨는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고 모두 불법으로 보면 고령 농민들은 결국 땅을 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같은 경기북부라도 농지 현실은 제각각이다. 가평은 작고 불규칙한 산간 농지가 많아 경작자를 구하기 어렵고, 연천은 농업인구 감소로 소수 농업인에게 경작이 집중되고 있다. 포천은 전통 농촌과 개발 압력이 높은 도시 인접 지역이 공존하며, 동두천은 도심 주변 농지의 주차장·야적장·창고 등 불법 전용 여부가 주요 쟁점이다. 이를 단순히 ‘수도권 투기 위험지역’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묶으면 산간·접경지역의 현실을 놓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헌법과 농지법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 원칙을 규정한다. 정당한 사유 없이 직접 경작하지 않거나 허용되지 않은 방식으로 임대하면 처분명령이나 이행강제금 부과 대상이 될 수 있다. 다만 고령 은퇴농의 농지나 상속농지 등은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임대할 수 있고, 농지은행을 통해 실제 농업인에게 맡기는 방법도 있다. 문제는 상당수 고령농이 제도를 잘 모르는 데다 산간의 작은 밭은 임차인조차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농업계에서는 단속에 앞서 읍·면 단위의 방문 안내와 상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임대 가능 여부와 계약서 작성 방법, 농지은행 위탁 절차를 설명하고 경작자를 찾기 어려운 소규모 농지에는 별도의 관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기북부의 한 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외지인의 투기성 농지와 고령농의 불가피한 임대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며 “농지를 지키려다 폭염 속에서 쓰러지는 농민이 없도록 합법적인 임대와 은퇴농 지원 통로를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노인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허리를 숙였다. 뽑아낸 잡초가 쌓여갔지만 손대지 못한 밭이 더 넓었다. 경자유전은 농지를 투기로부터 지키기 위한 원칙이다. 그러나 그 원칙이 평생 농촌을 지킨 노인들에게 또 하나의 짐이 돼서는 안 된다.
이번 전수조사의 성패는 개발이익을 노린 위장 자경과 늙고 병들어 농기구를 놓게 된 농민의 사정을 얼마나 세심하게 구분하느냐에 달려 있다. “평생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제 늙어서 더는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땅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BEST 뉴스
-
군수도, 공직사회도, 지역주민도 모르는 가평 ‘공동화 위기’…3년 뒤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지난 8일 서태원 가평군수가 '군민의날'을 기념해 축사를 하고 있다[사진 정연수 기자] 경기 가평군이 인구감소지역으로 다시 지정된 가운데 3년 뒤로 다가온 춘천~속초 동서고속화철도 개통이 지역 관광산업과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중장기 대응 전략을 점검... -
서태원 가평군수 재산 15억[공시지가]…토지만 32필지·8억8700만원
서태원 경기 가평군수가 올해 공직자 재산신고에서 15억1,219만7천원의 재산을 신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눈에 띄는 것은 토지다. 서 군수는 논과 밭, 대지, 임야, 과수원 등 모두 32필지를 본인 명의로 신고했다. 신고가액만 8억8,699만3천원으로 전체 신고재산의 약 58.7%에 해당한다. &nbs... -
백영현 포천시장 재산 29억9천만원…1년 새 2억8천만원 늘었다
백영현 포천시장이 29억9,326만2천원의 재산을 신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종전 신고액 27억765만원보다 2억8,561만2천원 증가한 규모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2026년도 정기재산변동사항을 보면 백 시장은 경기도 31개 시장·군수 가운데 신고재산 규모가 세 번째로 많았다. 도내 시장·군수 평균 재산 16억... -
한기호(국민의힘) 대폭발 "입만 나불거리지 마라!" 부상자 은폐·축소 의혹
[질의 응답] 한기호/지금 환자 얘기해 볼까요. 지금까지 거론되는 것이 2명만 얘기되고 있습니다. 환자가 2명이 아니잖아요. 근데 2명이라고만 얘기하죠. 축소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한 행동에 대해서 변명만 하는 자리가 된... -
문세광의 사형전 최후발언 공개
"일본에서 그들에게 속았습니다" 육영수 여사 살해범 문세광의 마지막 고백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를 살해한 문세광의 사형 전 최후 진술 내용이 공개되었습니다. "나는 바보였습니다... 저들에게 속아서 과오를 범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 -
군부대 나가라면서 땅은 넘겨준다? 포천시의 앞뒤 안 맞는 행정
제196회 포천시의회 정례회서 윤경례 의원이 백영현 시장에게 요구한 네가지...옛 6군단 시유지 맞교환 전면 재검토 촉구 군부대에는 나가라고 하면서 그 군부대가 계속 사용할 땅은 아예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앞뒤가 맞는 행정인가. 포천시가 추진하는 옛 6군단 부지의 시유지 맞교환을 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