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종 부스럼에 유효’라는 문구와 함께 매화·무궁화 문양이 둘러싼 흑백 포장지. 한때 전국 약방 진열대 절반을 차지하다시피 했던 이명래 고약은 일제강점기부터 1970~80년대까지 한국인의 상비약으로 군림했다. 단순한 피부질환용 붙이는 약을 넘어, 식민지 시기 ‘조선인 손에서 나온 조선 약’의 자존심을 상징한 브랜드였다.
◇가난한 약종상, 국민 브랜드를 만들다
이명래 고약의 창시자는 충청도 출신 약종상 이명래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서울로 올라와 한약재를 취급하며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고(膏) 형태의 연고 처방을 발전시켜 상처·종기·부스럼에 쓰는 고약을 만들어냈다. 당시 일본제 연고와 분말약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값이 비싸고 피부에 독하다는 불만이 적지 않았다.
이명래는 값은 낮추고 효과는 놓치지 않는 ‘국산 대체재’를 목표로 삼았다. 파스 형태가 아닌, 천에 연고를 펴 바르는 전통식 고약 방식으로 접근성을 높였다. 시골 장터에서도 쉽게 구해 붙일 수 있는 약이라는 점이 금세 입소문을 탔다. ‘이명래 선생의 창제’라는 문구가 포장지에 당당히 인쇄된 것도 일본제 약에 맞서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포장지 한 장에 담긴 시대정신
사진 속 포장지는 이 약이 단순한 상품을 넘어 하나의 시대 풍경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앙에는 한자로 ‘李明來膏藥’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고, 주변을 감싼 장식 테두리와 꽃 문양은 서양식 그래픽과 전통 문양이 뒤섞인 과도기 한국 디자인의 전형이다. ‘등록 상표’라는 표기와 함께 ‘각종 부스럼에 유효’라는 문구가 소비자의 눈을 붙잡았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제조자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부분이다. 대기업 상표가 아닌, 개인 발명가의 이름을 브랜드로 삼은 이 구성은 당시로서 이례적이었다. ‘이명래 고약’이라는 고유명사는 이후 ‘고약’ 자체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처럼 쓰일 정도로 강력한 브랜드가 됐다. 이 과정에서 이명래라는 개인의 서사는 자연스럽게 ‘국산 의약품 개척자’라는 상징으로 확장됐다.
◇세대를 관통한 생활의 약, 그리고 퇴장
이명래 고약은 해방 이후에도 약국과 재래시장에서 꾸준히 팔리며 ‘국민 고약’의 지위를 이어 갔다. 상처가 나면 먼저 붙이고 보던 세대에게 이 약 특유의 냄새는 어린 시절 기억과 분리할 수 없는 생활의 냄새였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파스, 항생제 연고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까지, 이 고약은 외상·종기·다래끼까지 두루 담당하는 만능약으로 통했다.
그러나 의학이 발전하고 제제 기술이 정교해지면서, 고약 특유의 끈적함과 냄새, 피부 자극은 오히려 약점으로 부각됐다. 사용 편의성과 위생을 앞세운 신제품들이 등장하며 이명래 고약의 자리는 점차 좁아졌다. 결국 대량 유통망에서 사라지고, 일부 향수 어린 소비자들 사이에서만 ‘옛 약’으로 회자되는 존재가 됐다.
◇사라진 상표, 남은 질문
이명래 고약의 역사를 돌아보면, 몇 가지 질문이 남는다. 첫째, 개인 발명가가 만든 국산 의약품 브랜드가 어떻게 전국적 파급력을 갖게 되었는가. 둘째, 그 브랜드가 사라지는 과정에서 어떤 공적 기록과 지식이 보존되지 못했는가. 셋째, 오늘날 K-바이오와 제약 강국을 말하면서 이 같은 선구자들의 이름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한때 집집마다 하나쯤은 있었던 이 고약의 포장지를 다시 들여다보면, 그것은 오래된 약 광고가 아니라 한국 근대 보건·산업·디자인의 교차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료처럼 다가온다. 냄새도 진하고, 자국도 진하게 남기던 ‘촌스러운 고약’이 사실은 국산 의약품과 자립의 꿈을 가장 먼저 몸으로 증명해 보인 개척자의 흔적이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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