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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수 기자 | 기사입력 : 2025.03.2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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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1923년 11월 11일 체포되어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 되었다. 그의 재판은 체포된 지 한참 후인 1924년 2월 26일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선동적 연설이 무기인 히틀러는 법정을 그의 정치선전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는 재판받는 내내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재판정은 그의 정치사상을 펼치는 무대가 되었다.

히틀러는 뮌헨 폭동은 무능한 의회 통치에 대한 국민으로서의 방어권이었다는등 억지 주장을 하면서 바이에른주 정부와 정부 요인들이 폭동에 어떻게, 얼마나 협조했었는지 등을 다 기억한다는 협박 전술을 구사했다.

이런 상황이 독일 국민들에게 상당히 어필하는 계기가 됐고 그렇게 독일의 불행은 잉태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무능한 독일 정부에 염증을 느꼈던 독일 국민으로서는 히틀러의 법정 연설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재판 과정은 언론을 통해 계속 보도되었고 재판을 받는 동안 히틀러는 갈수록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히틀러의 협박 전술과 선전 선동술이 먹힌 뮌헨 법정은 1924년 4월 1일, 히틀러에게 금고 5년을 선고했다.

자료에 따르면 이 법정은 여러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상급법원에서 다뤄야 할 죄임에도 협박 전술에 겁먹은 바이에른 주 정부 요인들이 뮌헨 법원에서 재판할 수 있게 손을 써줬고..

히틀러는 1922년 1월 폭력선동죄로 일종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가중처벌됐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국적인 히틀러는 즉시 추방되어야 했으나 1차대전에서 독일군으로 참전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지 않았다.

심지어 주심 판사는 정치 이념이 같은 자로 히틀러의 이전 폭행사건을 맡았을 때도 솜방망이 처벌을 해 준 판사였다.

이 자는 히틀러의 눈에 들어 1941년 사망할 때까지 나치 정권 아래에서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이렇게 히틀러는 5년 형을 선고 받았지만 감옥 안에서 책도 쓰고 편하게 지내다가 1924년 12월 20일 9개월 만에 풀려나게 된다.

히틀러는 맥주홀 폭동 실패를 계기로 비합법적 수단을 통한 정권 장악을 포기하고 선거라는 합법적 수단을 통한 정권 획득으로 노선을 바꾸게 되었다.

히틀러를 전국구 정치 스타로 만들어 준 뮌헨 폭동의 원동력은 친위부대이자 정치깡패집단인 '돌격대(SA)'였다.

돌격대는 나치당의 집회가 있을 때면 정치적 훼방꾼들을 미리 정리해 히틀러가 안정적으로 연설할 수 있도록 했다.

돌격대는 전투 능력, 잔인성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히틀러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재명의 개딸들은 자칭 의미를 ’개혁의 딸‘이라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과격하고 폭력적인 그간의 행적을 볼때는 고칠 개(改)가 아닌 개(dog)로 인식된 지 오래다.

이재명의 극성 개딸들은 비이재명계를 표적 삼아 악성 문자폭탄으로 협박하고 수박이라 비하하며 온갖 인신공격을 함으로써 한 인간의 인권과 자존심을 짓밟음으로써 개아빠 이재명을 비호 하는 폭력집단이다.

1930년대 돌격대를 앞세운 히틀러의 공포 정치와 개딸들의 맹목적 충성심을 무기 삼아 전횡을 일삼는 이재명의 폭력적 정치 행태는 너무나도 닮아있어 섬뜩함을 준다.

그가 앞으로도 얼마나 더 우리 정치를 망가뜨릴지 알 수 없다. 이미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어이없고 황당한 정치판을 바라보면서 절망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이유이다..

▣ 13편으로 이어집니다.

2025년 3월 23일
전.남양주시장
국민의 힘 남양주 병.위원장 조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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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한 국민의 힘 남양주 병.위원장 이재명과 히틀러 그리고 나의 투쟁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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