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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내 일이 아니면 침묵하는 가평, ‘모래알 공동체’로는 발전 없다

  • 정연수 기자
  • 입력 2026.09.05 14:02
  • 조회수 46,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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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기대회.JPG

2020년 1월 17일 제2경춘국도 "가평군 안 수용하라"는 궐기대회를 마치고 행진을 하고 있다.[출처/NGN 뉴스D.B]

 

가평군민의 반대는 때로 지나칠 만큼 거세다. 귀농·귀촌인이 집 한 채를 짓거나 지역에 새로운 시설이 들어서려 하면 교통과 소음, 환경 문제를 앞세운 민원이 빗발친다. 사업과 직접 관련이 없는 마을발전기금이나 합의금을 요구한다는 잡음도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가평의 미래를 수십 년간 좌우할 대규모 국책사업 앞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내 집 앞의 작은 공사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학습권과 재산권, 교통망, 지역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제2경춘국도에는 침묵한다.

 

제2경춘국도는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에서 가평을 거쳐 춘천시 서면 당림리까지 이어지는 총연장 33.6㎞, 사업비 1조9천404억원 규모의 초대형 국책사업이다. 가평에서 이보다 큰 토목사업을 다시 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가평역 북측과 하색리 구간에는 높이 약 15m, 길이 260∼270m 규모의 성토 구조물이 계획돼 있다. 그대로 건설되면 가평역과 하색리 사이에 거대한 흙벽이 생긴다. 마을은 단절되고 가평역 북측 출입구 설치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가평중·고등학교 인근으로 왕복 4차로가 지나가면서 소음과 진동, 분진에 따른 학습권 침해도 우려된다. 달전리 주민들의 재산권과 생활권 문제도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도 가평의 시민사회는 고요하다. 주민단체와 사회단체는 어디에 있는가. 이장과 주민자치위원, 새마을회와 각종 직능단체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가평군에는 125개의 각종 위원회가 있고 위원 정원만 1천543명에 이른다. 인구 6만3천여 명의 농촌지역으로서는 엄청난 규모다.

 

그 많은 위원과 단체 가운데 제2경춘국도 노선을 제대로 분석하고 주민 권익을 대변하며 공법 변경을 요구한 곳은 얼마나 되는가. 지역의 미래를 논의하라고 만들어 놓은 위원회가 회의수당을 받으며 집행부 안건에 손만 들어주는 조직이라면 존재 이유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가평에는 정당한 일에도 자신이 앞장서지 않고 남의 등을 떠밀며 “네가 대신 말해 달라”고 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할 말이 있어도 공개된 자리에서는 입을 닫고, 회의가 끝난 뒤에야 삼삼오오 모여 궁시렁거린다. 책임져야 할 자리에서는 침묵하고 뒤에서는 불만과 비난을 쏟아낸다.

 

가평이 누구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안다고 할 정도로 좁은 지역사회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가 인간관계가 틀어지거나 사업과 생업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할 수 있다. 친·인척과 선후배,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지역에서 실명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좁은 지역사회라는 사정이 언제까지 침묵과 뒷담화의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옳은 일에는 이름을 걸고 말하지 못하면서 뒤에서만 흉을 보고 누군가 대신 싸워주기를 기다리는 문화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책임 없는 뒷말은 여론이 아니다.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소음일 뿐이다.

 

제2경춘국도 노선 논의 초기부터 가평의 대응은 한발 늦었다. 2019년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사업으로 확정됐을 당시 춘천시는 청평댐과 삼회리 방향, 자라섬과 남이섬 사이를 지나는 방안 등을 검토해 정부에 제시할 만큼 발 빠르게 움직였다.

 

반면 가평군은 뚜렷한 대안을 선제적으로 내놓지 못했다. 노선 논의가 상당 부분 진행된 뒤에야 반대 목소리를 냈고, 주민 시위도 사업 발표 후 한참이 지나서야 시작됐다. 가평군이 처음부터 지역의 교통과 관광, 정주 여건을 종합한 계획을 갖고 정부와 협상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수 있다.

 

상면과 조종면도 마찬가지다. 당초 상면 덕현리 산장관광지 인근에 계획됐던 나들목이 북쪽으로 약 2㎞ 떨어진 솥틀마을 인근으로 변경됐지만 일부 주민의 항의는 지역 전체의 목소리로 확산하지 못했다. 설악면 주민들은 도로가 자신의 지역을 직접 통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심에서 멀어졌다.

 

마장리와 북면 주민들도 보납산 터널을 뚫어 춘천시 안보리로 연결하는 노선안이 거론될 때는 한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경춘선 철도와 나란히 달전리를 통과하는 노선이 확정되자 관심이 빠르게 식었다.

이것이 지금 가평의 가장 큰 문제다. 상면의 문제는 상면 주민만의 일이고, 북면의 문제는 북면 주민만의 일이며, 가평읍의 문제는 가평읍 주민만의 일이라는 식이다. 자신의 땅과 집값, 사업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면 지역 전체의 문제조차 남의 일로 취급한다.

 

반대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주민의 생활권과 재산권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문제 제기는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공익보다 개인의 금전적 이익을 앞세우거나 민원을 협상의 수단으로 삼아 돈을 요구하는 행위까지 주민 권리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상면 임초리의 한 공사 현장에서는 특정 가족이 100건이 넘는 민원을 제기하고 합의금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이 마을의 이장과 부녀회장, 새마을지도자 등 마을 직책을 가진 사람들까지 민원을 제기하지 않는 조건으로 금품을 받았다.

 

주민을 대표하라고 맡긴 직책을 개인의 이익을 챙기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면 이는 주민 권리 행사가 아니다. 정당한 민원도 아니고 마을을 위한 활동도 아니다. 공동체의 이름을 앞세운 이권 개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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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7일 제2경춘국도 "가평군 안 수용하라"는 궐기대회를 마치고 행진을 하고 있다.[출처/NGN 뉴스D.B]


가평은 유난히 반대가 많은 지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단 반대하고 보는 문화 속에서는 관광시설도, 주거시설도, 기업도 제대로 들어서기 어렵다. 그런데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반대가 지역의 장기적인 발전과 공동의 권익을 지키는 데에는 좀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 호주머니와 내 땅에 관계된 일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정작 가평 전체의 미래가 걸린 국책사업에는 침묵한다면 그것은 시민의식이 아니라 지역 이기주의다. 이해관계가 있을 때만 뭉치고 실속이 없으면 흩어지는 공동체는 모래알과 다르지 않다.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뒤에서만 불평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서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숨어 있고, 다른 사람의 등을 떠밀어 대신 말하게 하는 비겁한 관행을 끊어야 한다. 주민 모두가 익명의 제보자나 구경꾼으로만 남는다면 지역을 바꿀 주체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다.

 

청와대 서태원.jpg

지난달 27일 정부서울청사와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민선 9기 시장.군수.구청장 국정 설명회에서 서태원 가평군수(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를 비롯한 경기도 시장 .군수들이 이재명 대통령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서태원 군수가 가평역·하색리 구간을 성토 방식에서 교량 방식으로 변경해 달라는 이재명 대통령과 정부에 정책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한 것은 늦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군수 한 사람의 건의서만으로 약 60억원의 추가 사업비와 총사업비 변경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군수 혼자 건의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군민이 힘을 보태야 가능성도 있다. 

 

가평군의회와 지역 정치권, 주민단체,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단체, 상인회와 사회단체가 공동대책기구를 구성해 정부와 국토교통부를 압박해야 한다. 교량화에 따른 지역 연결 효과와 학습권 보호, 가평역 북측 출입구 설치, 관광·교통망 확충 방안을 객관적인 자료로 만들어 제시해야 한다.

 

토지보상이 초기 단계인 지금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공사가 본격화되고 성토 구조물이 올라간 뒤에는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늦는다. 지금 침묵하고 있다가 훗날 “왜 가평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느냐”고 행정을 탓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가평군민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반대가 아니다. 사익을 위한 민원에는 냉정하고, 지역의 미래와 공동의 권익을 위해서는 읍·면의 경계를 넘어 함께 목소리를 내는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할 말이 있다면 뒤에서 궁시렁거릴 것이 아니라 공개된 자리에서 당당하게 말하고 그 주장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제2경춘국도가 가평을 단순히 통과하는 도로가 될지, 가평 발전을 견인하는 새로운 교통축이 될지는 지금의 대응에 달려 있다.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남의 등을 떠밀며 누군가 대신 싸워주기만 기다리는 순간, 가평의 미래 역시 남의 손에 맡겨진다.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뒷담화만 무성한 지역에는 누구도 좋은 길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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