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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수 기자 | 기사입력 : 2024.06.2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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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제74주년 기념행사가 있던 그날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 끝까지 잊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아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을 기억하는 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전장에선 조국의 영웅,교단에선 훌륭한 선생님이셨습니다

당신은 가평 군민의 자랑이고 영광입니다.


신일균1.JPG

 2020년 11월 전몰 학도의용대 추도식 행사 후 참전비에서...신 옹 선생의 생전 모습 [자료=국방일보]

 

[NGN 뉴스=가평] 정연수 기자=6.25 전쟁 제74주년 기념행사가 있던 날, 가평 한석봉 체육관엔 참전용사.유공자.유가족 등 6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기념식에선 전쟁에서 산화하신 영령들을 추모하고,전쟁영웅들을 소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전쟁 영웅들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유공자 가족들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런데 기념식에 참석했어야 할 신일균 옹은 부재였다. 그날 영면(永眠)에 들었기 때문이다.

 

신일균 그는 누구인가? 가평에서 태어나 고려대 법학과 재학 중 6.25가 발발하자 가평군 학도 의용군을 결성, 사그막. 빛고개 전투서 북한군과 총격전을 벌인 인물이다.

 

가평군 학도 의용군 2지대장이 된 그는 전장 속에서 영어·수학을 가르쳤고, 전쟁이 끝나자, 후진양성을 위해 교단에 올라 가평고등학교장과 학도의용군 전우회 경기북부지부장을 역임했다.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50년 6월25일 체육대회가 한창일 때 “비상 38선 일대에 전쟁이 벌어져 계엄령 선포와 무기한 휴교에 들어간다”라는 방송을 들었다. 그는 고향 가평 소식이 궁금했다. 당시 38선이 가평 인근을 지나고 있어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가평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앞이 캄캄했다. 곧 바로 가평에 도착했는데, 이미 북한군과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의 인민군 선전 활동이 벌어져 산으로 도망쳤다. 3개월여 산속에서 은둔하던 그에게 1950년 9월 15일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라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10월 5일 가평을 수복했다는 연락을 받고 지역 청년들을 모아 학도의용군. 대한 청년단·향토방위군 등 호국 결사대를 조직했다.

 

북한군에게 노획한 AK소총으로 무장하고 후퇴하는 패잔병 400여 명을 국군에 인계한 공로로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1월 들어 적의 항전이 거세지면서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학도의용군은 가평에서 청평으로 본부를 옮기고 피난민과 함께 국군의 후퇴를 도왔다.

 

가평은 강원도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교통 요충지로 전쟁 당시 뺏고 뺏기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가평 전투는 6.25 전쟁 역사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것으로 기록됐다.

 

신일균 옹이 이끌던 학도의용군과 북한군이 첫 총격전 벌어진 것은 11월11일 사그막전투와 12일 빛고개 전투였다.

 

신 옹은 생전 국방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뒷산인 사그막에서 북한군과 맞닥뜨렸는데, 이들이 우회해 후방에서 공격하면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됐다”라며 “겨우 후퇴해 전열을 정비했고, 다음 날 경춘국도 보급로 확보를 위해 빛고개 전투에 투입돼 적의 기습을 막아내는 등 아군에 많은 도움을 줬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당시 대장을 보좌하던 부대장이었던 그는 북한군 동태를 살피고 상황을 보고하려고 파출소로 가던 중, 그 사이 먼저 청평으로 간 동료들이 적과 정면으로 맞닥뜨려 많은 전사가가 발생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그때 나도 함께 싸웠더라면...평생 후회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후 1950년 12월 가평군 학도 의용군 2지대장으로 임명된 그는 가평·북면·설악 지역에서 모인 120명의 학도의용군을 그의 휘하에 두고 적과 싸웠다.

 

그리고 1·4후퇴 당시 대구까지 내려갔던 그의 부대는 전선에 복귀해 용문산 전투와 파로호 전투에도 투입돼 조국을 지켰다.

 

정전이 되자 학도의용군도 해산됐다. 그러면서 그의 신변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는 “전쟁이 할퀴고 간 곳에서 학생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의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뜻을 같이하는 지인과 친구를 불러 모아 체계를 갖춰나갔다.”

 

전쟁 속에서도 전우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던 그는 그렇게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앞장서, 가평고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교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먼저 간 전우들과 유가족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 산화한 전우들의 명예 회복에 앞장서며 일생을 보냈다.

 

군번 없는 학도병의 영혼을 달래고, 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2000년 성금과 군 지원금을 모아 ‘가평군 학도의용대 참전비’를 건립했다. 이곳에서는 매년 11월11일 전몰 학도의용대 추도식이 거행된다.

신일균.JPG 

2020년 6월,참전용사 부대방문 행사에서 신일균(왼쪽)학도의용군전우회 경기북부지부장이 최장식(소장)육군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과 경례하고 있다.[출처=국방일보]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비록 군복은 입지 않았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 학도의용군이 나섰다는 걸 영원히 기억해 줬으면 하는 게 학도병 출신이자 교육자로서 하나의 소원입니다.”라고 전했다.

 

그리고 6.25 발발 74년이 되던 그날 조국엔 영웅! 가평의 영광인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신일균 옹께서 생전에 말씀하셨던 “젊은 나이에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정신을 계승하면서 대한민국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국민 정서가 뿌리내리길 간절히 바란다”라고 했다.

 

당신의 소망과 뜻은 5천만 국민과 6만 3천여 가평군민에게 맡기시고 편히 잠드소서. 당신은 가평군민의 영원한 영웅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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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않겠습니다.영광의 이름 신일균 옹!…당신은 조국과 가평의 영웅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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