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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연속 컬럼.. 2부 석봉 한호와 잠곡 김육

  • NGN뉴스 정연수 기자 기자
  • 입력 2021.10.04 14:56
  • 조회수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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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1부.가평군 잠곡(潛谷)과 대동법의 명재상 김육

2부.석봉 한호와 잠곡 김육

3부.스토리텔링 콘텐츠의 보고 잠곡 김육

4부.공정의 시대와 잠곡 김육 

5부.가평군의 발전과 잠곡 김육


[기고=신동진 잠곡김육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로 칭송받는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 필자가 가평군으로 귀촌을 하고 보니 가평군에서 한석봉을 매우 적극적으로 선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뭔가 들어보니 첫째, 한석봉이 초대 가평군수를 지냈고, 둘째 가평군 군수로 재직 시에 하나의 돌(石)로 이뤄진 봉우리(峯)인 보납산의 아름다움에 반해 자신의 호를 석봉(石峯)이라 지었고, 셋째, 한석봉이 자신이 아끼던 벼루와 보물을 묻어둬서 현재의 보납-보물 보(寶), 넣어둘 납(納) -산 이름이 지어졌다는 얘기였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한석봉이 가평군 초대군수라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한석봉이 가평군수로 재임한 것은 1599년~1601년이다. 그런데 가평현이 가평군으로 승격된 것은 1507년(중종2년)이다. 중종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이 어딘가에 있던 자신의 태(胎)를 가평현에 옮겨 묻고 가평현을 가평군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한석봉이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36년 지난 뒤이니 ‘초대’ 가평군수는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둘째, ‘석봉’ 보납산이 한호의 호 ‘석봉’의 유래라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 한호가 군수가 되기 전에 이미 ‘석봉’이라는 호를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여러 군데 있다. 


그중 하나가 1572년(한석봉 30세)에 조선에 왔던 중국(명나라) 사신이 한석봉의 글씨체에 반해 쓴 시다. 그 제목이 ‘한석봉 선생에게 보내는 시(小詩寄 韓石峯先生)’로 이미 한호를 ‘석봉’이라 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명나라 사신들이 한호의 글씨체를 보고 반해 이때부터 ’한호‘가 ’한석봉‘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도 명필로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호의 호 ‘석봉’은 그가 태어난 황해도 금천군에 있는 ‘석봉(石峯)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셋째, 현재 보납산 이름이 한석봉이 벼루와 보물을 넣어뒀기 때문이라는 얘기는 그저 떠도는 설이다. 


2004년 가평문화원이 한석봉의 글과 이야기 등을 총망라해서 발간했던 「석봉실기」에 보면 ‘보납산은 석봉 한호 선생이 군수로 부임해 민란의 평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그 제문을 산에 묻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역사적 사료가 아닌 전설 속에서도 제문을 묻었다는 얘기는 있어도 벼루와 보물을 묻었다는 얘기는 없다.

 

결국, 필자가 들은 한석봉과 가평군의 인연 중 역사적 사실은 1599년~1601년 가평군수를 지냈다는 사실 하나다. 이 사실을 확대 과장해서 한석봉을 가평군과 좀 더 관계 깊은 인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을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모든 민간설화는 어떤 작은 사실에 민중의 한과 열망이 덧붙여져서 좀 더 극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석봉’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야기, 바로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씨를 써라’라는 이야기다. 


남편도 없이 떡을 팔며 어렵게 자식 교육 뒷바라지하며 강하게 키우려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그리워 찾아온 자식 간의 애틋한 승부. 결국 어머니의 뜻을 깨닫고 반성해 마침내 명필이 됐다는 이야기. 이 감동적 성공신화는 조선 선조 이후 각 서당에 보급된 <한석봉 천자문> 서첩과 함께 퍼졌을 것이고, 그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에 교과서에, 해방 후에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세대를 불문하고 전국적으로 퍼졌다. 


어찌 보면 한석봉은 일제가 은폐하려 했을 세종대왕 이나 이순신 장군 보다도 더 유명한 위인이었을 것이다. 가평군은 이런 전국적인 유명 스타 한석봉을 간절히 우리 고장의 인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석봉과 그 어머니 이야기의 무대는 개성이라는 설과 영암이라는 설 두 가지가 있다. 


북한에 있는 개성은 차치하고 전남 영암에서 만약 지금이라도 이 유명한 이야기를 이용해 한석봉을 영암의 인물로 독점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필자는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이미 2004년에 <석봉 한호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가평문화원과 함께 「석봉실기」를 냈고, <청주 한씨 중앙종친회>는 자신들이 미처 이런 책을 내지 못한 것에 부끄러워하며 책을 내준 가평군에 감사해했고, <가평문화원>은 올해까지 무려 21회나 「석봉 한호 선생 전국휘호대회」를 진행하며 한석봉의 선양에 앞장서 왔고, 가평읍에는 「한석봉 도서관」, 「한석봉 체육관」도 있으니, 한씨 문중과 기념사업회는 물론 일반 국민도 가평군과 한석봉을 떼어놓기는 어렵게 돼버린 것이다. 


가평군의 노력이 되돌릴 수 없는 가평군의 문화역사 콘텐츠를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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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잠곡 김육을 보자. 


 가평군에서 살았던 시간을 보면 한석봉보다 훨씬 길다. 


그를 기리는 <잠곡서원>이 1705년에 설립돼 1870년 철폐될 때까지 160여년간 가평군 선조들의 교육과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했다. 


대동법과 잠곡 김육은 교과서에도 실려있으며, 현재 남양주 실학박물관의 전시실 첫머리에 조선시대 최고의 경세개혁가로, 실학의 태두로 모셔져 있다. 


그런데 이런 분에 대한 가평군 민관의 관심과 선양을 위한 노력은 어느 정도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다. 


석봉 한호 선양은 종친회나 기념사업회에 미루지 않고 솔선했던 가평군이 왜 잠곡 김육에 대해서는 주저하는 것일까? 필자는 가평군 민관이 잠곡 김육 선생을 잘 알게 되면 석봉 한호 선생을 선양하기 위한 노력을 했던 것과 같은 열정을 보여줄 것이라 믿는다. 


그만큼 잠곡 선생의 삶은 무궁무진한 역사문화 유산 콘텐츠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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